[CRITIQUE] 이선영: 세상의 기준을 상대화하는 나무 같지 않은 나무들


September 29. 2021


김태화의 작품에는 등장하는 소나무는 소나무를 에워싼 그럴듯한 환상이 부족하다. 소나무는 푸르름에 목마른 도시인에게 특히 인기 있다. 그러나 세계 민요에 소나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전에도 보편적이었던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김태화의 작품 속 소나무들은 명품거리를 조성한다며 기존에 잘 서 있던 가로수들 몽땅 베어내고 어느 날 갑자기 대체된 소나무들이 값비싼 고층 아파트를 장식하기 위해 입구나 중정에 이식된 거대한 소나무의 '있어 보이는' 모습이 없다. 소나무가 관상용이 되면 이러저리 틀어진 각도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물신숭배의 대상이 되며, 때로는 자연을 축소해서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뒤틀린 왜곡된 형태가 애호되기도 한다. 독야청청(獨也靑靑)으로 대변되는 고독하고 꿋꿋한 결기나 '솔아솔아 푸르른 솔아~'로 잘 알려진 민중적 분위기와도 큰 관력이 없다. 사진으로 치면 컬러가 아닌 흑백에 가까운 그의 소나무는 푸른색이 아니다. 존재보다는 그 그림자에 가까운 위상이다.



100X100, 캔버스에 유채, 한지


이번 전시의 주요 소재는 소나무라는 것만으로 반쯤 먹고 들어갈 수 있는 멋진 분위기를 무시하고, 굳이 키 작고 볼품없는 소나무가 선택되었다. 그것은 그의 이전 작업이 풀이나 잡초를 소재로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번 진시의 식물들은 잡초에 해당되는 나무, 즉 잡목이다. 순수하지 못함을 뜻하는 '잡(雜)-'은 쓸모가 없거나 아직 무엇에 쓸지 몰라서 남겨둔 분류 불가능한 것들을 말한다. 나머지들, 기타 등등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러한 쓸모없음 때문에 살아남아서 고향 야산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이 작가의 눈에 들어온다. 작품 속 나무들은 야산에서 벌목한 후 남은 나무들이다. 하지만 쓸모있는, 즉 잘 자란 나무들은 어디선가 기대치에 값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까. 올해 전시의 부제 [경계면에 서다]는 풍경 속 산등성이의 이쪽과 저쪽의 경계면에 선 자신의 모습을 은유한다. 동양화인지 서양화인지 모호한 그의 작품도 경계면에 서 있다.


풍경이면서도 추상적 효과 또한 중요한 형식 또한 경계면에 있다. 그가 어느 한 면에 안착하지 않는 것은 경계의 주요 소재인 나무 자체가 지하와 지상, 그리고 천상이라는 3계에 걸쳐 있는 존재와도 관련될 것이다. 생태적으로 자연을 대표하는 것이 식물, 식물을 대표하는 것이 나무다. 그의 작품에서 눈에 덮여있지만, 잠재적 경계면을 이루고 있는 능선들에 무리 지어 있는 소나무들은 사람처럼 보인다. 이전 작품에서 풀이 민초와 연결될 수 있다면, 각기 다르면서도 공통점이 있는 이 군집은 다중(多衆)을 연상시킨다. 자연에는 경계가 없다. 경계는 철저히 인간사회의 규칙이다. 쓸모로부터 배제된 잔여물에 주목하는 김태화의 작품은 경계를 의문시한다. 경계는 경계를 만드는 자와 그것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에게만 정당한 현실이다. 대개 경계는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질서이며,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진 규칙에 불과한 것을 자연화시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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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견(doxa)이 유지되고 확장될 수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어느 날 임의적으로 그어진 경계는 굳어져 버린다. 이러한 경계는 시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와해 되기도 하지만, 도전해야만 하는 장벽이 되어 역사적 비극을 낳기도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수 많은 경계 위에서 시험 받는다. 하지만 작가란 경계면에 설 수 밖에 없는 존재다. 김태화는 삶과 예술에 공통으로 걸쳐 있는 문제를 작품의 전면에 드러냈다. 하지만 그가 경계면에 서 있다고 해서, 무조건 지금 여기를 부정하고 저기만을 이상화하는 초월에 전제되는 관념주의, 금욕주의, 환원주의 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눈 풍경은 생명체에게 모진 겨울이라는 계절 속에서 따스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실제 온도와 상관없이, 무엇인가 소복히 덮여 있는 모습에서 온 것일 수 있지만, 이 전시의 주제와 관련되어 쌓인 눈이 경계를 모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렇게 됨으로서 경계면에 선 애매한 존재들을 더 부각시킨다. 작가는 여름에는 전혀 보이지 않던 작은 소나무들이 눈이 덮이자 그들만의 세상이 펼쳐진 극적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절경들과도 다른 장관이었다. 실제지만 실제같지 않은 이 환상적인 장면을 위해 작가는 소나무의 색이자 자연의 대표적인 녹색을 배제했다. 나무들의 존재를 부각시킨 하얀 눈 색과 어울리는 검정을 택했다. 유화지만 수묵화처럼 담백하게 채도를 떨어뜨려서 하얀 배경에 어울리는 형태를 집어 넣은 것이다. 이전에 그가 그린 이름없는 풀들을 생각하면, 그것이 실제 소나무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인긴의 행위는 결국 쓸모와 연결되기 때문에 잡목은 잡초의 연장 선 상에서 이해되낟. 그에 의하면 잡초와 나무는 경쟁하고, 작은 나무는 큰 나무가 되기 마련이므로, 잡초에 이은 작은 나무 풍경은 인간 주변 식물계의 생태와도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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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지만 잡초를 닮은 그 나무들은 세계수 등으로 고양되곤 하는 기념비적 위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진화론이나 역사에서 자주 보게 되는 계통수, 즉 나무의 원리가 추상화된 방식은 근원으로부터 출발한 어떤 단일한 질서를 정당화하곤 한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나무의 형태에 우주의 외관을 부합하려는 생각은 미개한 정신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추론의 하나다'(고블레 달비엘라)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나무가 종합적 우주 발생론에서 계급적 우주 논리학으로 옮아가는 과정을 추적한다. 나무는 추상화의 과정을 거쳐서 논리적 구조가 된다. 로베르 뒤마는 이를 통해 범주의 서열뿐만 아니라, 모든 언어의 어머니이며 문법적 논리학 속에 자리 잡은 지식의 백과사전적인 조직을 표현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근대 연 철학자 데카르트는 지식의 총체를 형이상학 위에 세워 놓았다고 평가된다. 지식을 펼치는 기반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일관성에 사로잡힌다. 


근데의 계몽적 지식인의 특징짓는 일면적 자신감이다. [나무의 철학]에 의하면 관찰하고, 구별하고, 특징짓고, 명명하고 분류하는 일에 대한 추상적 모형을 만들어 준 것이 바로 나무다. 그것은 또한 진화의 표상적인 영상이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를 비롯한 진보적 철학자들은 이러한 계급적 사고와 연결될 수 있는 계통 발생학적 나무에 대한 이미지를 해체하고자 했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뿌리가 아닌 뿌리줄기의 이미지다. 김태화의 잡초나 잡목은 계통수로 대변될 수 있는 전형적 나무 보다는 뿌리줄기의 이미지에 더 부합한다. 특히 좌우로 긴 화면들에 배치된 나무들은 나무의 전형성을 탈피한다. 하나의 장면은 또다른 장면들과 횡적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는 늘 지금 여기가 아니라 횡적 연결망을 타고 나아갈 수 있는 미지의 세계를 나무같지 않은 나무에서 본다. 이번 전시의 소나무 군락도 포함되었던 2016년의 개인전 [nostalgia]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잡초들을 화면 가득히 포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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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화는 그 전시의 작가노트에서 ‘내가 그리는 풀은 풍경 속 풀이 아니고, 필요 없다고 해서 뽑혀서 버려진 풀이다, 그런 풀들이 캔버스에서는 조용히  화려하고 품위가 있다. 우리도 그랬으면 한다’고 말했다. 소나무는 풀보다는 개체화된 상태지만, 여전히 ‘나머지들’이라는 범주에 속한다. 일단 소나무가 경계면에 서식하고 있는 것이지만, 잡목으로서의 위상은 그 자체가 경계면 위의 존재임을 말한다. 하지만 하지만 경계면은 원래 비옥한 지대다. 문명 자체가 그러한 곳에서 발생했다. 물질문명 뿐 아니라 신화부터 동화, 예술작품에 이르는 정신적 자산 또한 마찬가지다. 예로부터 경계면에서 많은 드라마가 발생했다. 원수 집안의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신화와 대중문화의 주인공인 영웅이나 괴물들이 다 경계면 위의 존재들이다. 인류학은 여기에서 인간사회를 성립시키는 원리를 발견한다.


선과 악, 순수와 오염, 성스러움과 불경 등은 모두 어떤 경계면을 설정하는데, 이러한 경계(금기)는 위반의 조건이기도 하다. 김태화는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바탕으로 경계면에 대한 사유를 자연스럽게 풀어간다. 경계면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라는 농촌 어린이다운 상상으로부터 화가가 된 현재까지 이어진 것이다. 예술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과 거기로 접근해가는 자기만의 방식을 인정해주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하기야 그조차도 사회의 지배적 가치를 따르다 보면 다른 분야와 다를 바 없지만 말이다. 작가는 극단적인 결정만을 요구하는 살벌한 어른의 세계에 진입했을 때,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했던 시절을 다시 기억했다. 그는 농촌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도시로 가기 전까지 농사꾼인 아버지 일도 도와가며 유년기를 보냈다. 땔감 줏기는 물론, 지금도 토끼나 노루가 가는 길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몇 십 년 주기로 실행되는 농촌의 벌목 풍경에서 받은 인상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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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더욱 귀하게 다가오는 그의 자전적 경험은 중요하지만, 그러한 경험이 효과적으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색다른 형식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가 경계면을 그토록 조하는 것은 경계가 결국은 실험의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도저도 아니지만 이것도저것도 될 수 있는 방식을 잡초나 잡목에서 이미 배운 터이다. 김태화의 작품은 유화 특유의 마티에르는 없고 전통 화법이 적용된 동양화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한지에 작업했다가 견고성 등의 문제로 캔버스 위에 동양화 기법을 적용했다. 한지를 붙여 그리고 난 후 뜯어내고 캔버스에 작업하는 방식이다. 그렇게함으로서 수묵담채의 번지는 느낌을 살릴 수 있었다. 한지로 기초 작업을 함으로서 우연성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였다. 한지로 하는 밑 작업은 스케치만 해도 번지며, 그 외에도 한지가 접히고 중첩되고 말리는 과정에서 공기가 얼마나 들어갔는가의 정도에 따른 다양한 흔적이 남는다. 그는 스미고 번지는 동양화의 화법을 캔버스 작업에 포함시킨다. 


작가가 시작은 하지만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는 우연적 과정은 보다 확실하게 지속되어야 했다. 작가는 바탕 작업을 도자기 굽기와 비교한다. 만들어진 형태가 가마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의 결과를 완전히 예측할 수 있는 도공은 별로 없다. 바탕 작업이 놀이에 가깝다면 형태는 다소간 재현적 노동에 가깝다. 바탕 위에 얹혀지는 소나무 형태는 화가로서의 숙련된 기술이 온전히 적용된다. 하지만 형태도 자세히 보면 불확실하다. 갈라지고 못쓰게 된 붓으로 그러진, 갈필 효과가 적용된 형태는 선묘보다는 점묘같다. 그 또한 바탕의 희미한 얼룩처럼 조그만 자극에서 흩어질 것같은 불확정성이 있다. 등산을 좋아하고 사진도 잘 찍으며, 이번 전시의 풍경 또한 실제 경험에서 출발했지만, 그 결과물은 실경이 아니다. 그가 직접 보고 찍고 한 것들은 무의식이 되어 간접적인 영향을 줄 뿐이다. 그의 풍경은 우연과 필연이 복합되어 있다. 어느 산인지 어느 시간대인지 불분명한 장면은 굳이 풍경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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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선과는 거리가 있는 묘사는 그의 풍경에 우연에서 꺼낸 무엇임을 암시한다. 바탕과 형태에 다르게 적용되는 이중적 과정은 이전의 풀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여서, 풀 위에 뜬 달이 있는 작품의 경우 우연의 효과가 극대화된 번지기와 뿌리기 등이 실행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특정 부위에 뿌리는 식의 의도가 더 명확히 관철된다면, 요즘의 바탕 면은 우연성에 더 개방되어 있다. 그가 산등성이 경계면에서 기대하는 미지의 세계가 바로 이 영역에 포진되어 있다. 작가가 그린 것이 아니라 그려지게 만든 배경은 우연성과 자유를 연결시킨다. 배경의 흔적들은 어떤 특정한 형태와 의미를 위해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것들은 불연속적이다. 허공 속에서 자유롭게 운동하는 원자같이 말이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 원자론자들이 우연의 역할을 부각시켰다고 평가한다. 우연은 19세기 같은 역사주의의 시대에 특히 배제되었던 요소다. 


진보 또는 종말을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역사의 길에 우연이 개입될 여지는 없었다. 역사는 기원과 목표가 있었다. 이러한 단선적 역사관은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한 치의 오차 없이 출세를 향해 나아가는 여로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은 우연이다. 만약 그런 것을 바란다면 비윤리적으로 간주될 것이다. 지나친 확신으로 가득한 자가 권력까지 쥐었을 때의 해악을 말할 것도 없다. 근대는 그러한 좌우익 파시즘으로 얼룩진 시기이기도 했다. 장 살렘에 의하면 우연은 황금시대의 신화부터 모든 형태의 목적론을 거부한다. 생명과 문명 역시 원자들과 허공의 우연적 사건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에게 자연은 필연과 우연(모든 기술혁신을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서의 필연, 그리고 정확히 기회로서의 우연)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인간들에게 발견의 기회를 제공한다. 장 살렘에 의하면 신성이 지배하는 시대에 원자론자들은 절대적으로 영원한 어떤 것이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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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미리 세워진 의도에 따라 사물들의 본성을 규제한 최고의 지성이 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철학은 우연의 체계라고 평가된다. 나무의 원리/ 뿌리줄기의 원리의 대립에서 우연은 뿌리줄기의 편에 선다. 그것은 기원과 최후의 목적을 가정하는 모든 관점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잘 살렘은 원자론자인 루크레티우스가 스토아학파가 발전시켰던 인간중심주의적인 과도한 목적론을 공격했다고 말한다. 대부분 특정 인간으로 귀결되는 인간의 편협한 질서로 자연을 재단하는 이후의 문명사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담겨 있는 것이다.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작품에 나타난 바와 같은 저 나무들은 패잔병처럼 남아있지만, 예술가의 기준은 다르다. 예술가는 손쉽게 가정되는 인간이라는 기준을 거부한다. 예술은 결국 인간, 특히 작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출발하는데, 김태화가 선택한 잡목은 인간/자신을 대변한다. 그의 풍경에서 인간이 따로 등장할 이유는 없다. 


약 15점이 출품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같은 크기의 작품군들이 유일한 분류원칙이 된다. 100x100cm 의 정방형 캔버스에 담긴 유화 작품은 다양한 먹의 농담이 적용된 동양화같은 느낌이 있다. 고향 동네 야산의 야트막한 언덕 여기저기에 꽂혀있듯이 보이는 작은 나무들. 원근법이나 지형은 희미하게 감지될 뿐, 자세한 묘사는 아니다. 하얀 눈이 내린 산은 동양화의 여백같은 공간성이 있다. 또 다른 작품은 근경에 소나무 무리들을 배치하고 하늘에 여백 많이 둔다. 여백 부분에 추상적 효과가 극대화된다. 동양화도 서양화도 아닌 어떤 경계에서 그림의 내구성 등을 실험하다 발견한 절충적 방식은 우연적 효과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작가는 소나무가 없이도 그림은 성립된다고 말한다. 그 경우에는 추상화가 되지만, 대상이 없다면 우연이 우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한 추상은 예쁜 무늬로만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빈약한 소나무는 주제와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지시대상의 비중을 최소화하는 선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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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그것이 반드시 특정 종의 식물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소나무이든 아니든 지시대상이 필요하다. 김태화의 작품에서 배경에 적용된 추상적 효과는 때로 흩날리는 눈이나 구름같이 애초에 정형적일 수 없는 대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우연과 유희의 영역이다. 하늘 부분에 날아가는 새 떼들이 보이는 작품은 언덕 너머의 세계를 넘나드는 존재를 표현한다. 하지만 새들은 마치 환영처럼 하얀 실루엣으로만 보인다. 135x35cm의 크기로 스펙터클한 효과를 주는 작품들은 이어서 배치하면 동선에 따라 시시각각 펼쳐지는 풍경이 된다. 가로로 긴 작품은 수평적 시점을 연장할 수 있다. 가다가 산자락 아래쯤의 관점이 적용된 풍경에서 소나무들은 마치 풍선처럼 위로 떠 있다. 전경에 나무가 많은 162x112cm의 작품에서 우연성의 효과는 매우 두드러진다. 눈, 구름, 별, 공기 등으로 보일 수도 있는 비정형 흔적들이 바탕에 자리한다.


그것은 아무리 작은 나무라도 지상의 생물들에게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은 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그의 작품에서 모여있는 나무들은 군중을 떠올린다. 다중은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자신이 처한 주변적 상황을 극복할 것이다. 200x65cm의 작품들에서 산의 실루엣은 다른 작품에 비해 강하다. 2016년 전시작품들에도 비슷한 경향이 보였다. 하지만 경계는 점점 흐릿해지고 있는 중이다. 그려진 것들이 소나무가 아니어도 상관없듯이 산 또는 언덕을 암시하는 이런 저런 능선들이 굳이 어떤 특정 지형을 가리킬 필요가 없다. 하얀 바탕에 검정 소나무들의 배치는 마치 음표처럼 능선을 따라 다양한 높이로 배치된다. 마찬가지로 그의 작품은 시간성이 불분명하다. 눈 덮인 산의 풍경이라는 분명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시간이나 장소나 특정되지 않는다, 오직 계절만이 확실하다. 시리즈처럼 보이는 같은 크기의 다른 작품은 마치 작가가 장기판 놀이를 하듯이 나무들을 이리저리 재치된 것을 볼 수 있다. 





미술평론가 이선영 



출전: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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