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심현섭: 공공미술 10/ 동시대 공공미술의 공론화: 세라의 <기울어진 호> 논쟁(2)


October 06. 2021



Richard Serrs's "Tilted Arc", in the Foley Federal Plaza, New York.



얼마 전,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예술인들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다양한 유형의 미술활동으로 문화를 통한 지역공간의 품격을 제고하기  위해 100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시행된 ‘우리 동네 미술’ 공공미술프로젝트가 사실상 종료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표절시비와 같은 공모심사과정, 미비한 지원제도, 예술인의 허술한 계획 등 해묵은 문제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문제의 원인이 비교적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반복되는 이러한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는 해당 사업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논쟁이 뒤따라야 한다. 사업에 대한 분석은 우선 사업의 투명한 공개로부터 시작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평가나 비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2017년 나는 서울시의 공공미술프로젝트 《서울은미술관》의 성공이 한국 공공미술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좀 더 구체적인 자료의 공개를 요청한 적이 있었는데, 몇 차례 서신교환 끝에 거절당했다. 당시 나는 사업주체들의 이 같은 폐쇄적 마인드가 미술의 공공성과 대중의 향유권 및 제작권에 걸림돌이 되어 한국 공공미술의 발전을 저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공공미술은 무엇보다 개방적이어야 한다. 전시장소 뿐 아니라 수행에서 평가와 같은 사후관리까지 모든 과정이 누구에게나 명징하게 열려있어야 한다. 해당 담당자나 전문가들끼리 속닥거리고 결정하는 사업 구조는 애당초 공공미술이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한국의 공공미술이 아직까지 오브제 중심의, 심지어 철거해야 마땅한 수준에 머무르고 프로젝트의 지속성이 부실한 이유 중 하나는 무엇보다 투명한 정보 공개와 이에 따른 평가의 부재, 논쟁의 기피, 전문가들의 권위의식을 기반으로 한 폐쇄성에 있지 않을까. 미국의 <기울어진 호> 논쟁을 보면서 부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세계적 반열에 오른 작가의 작품마저도 치열한 논쟁의 대상으로 삼고, 심지어 철거 대상의 심판대에 올려놓고 일반인에서부터 미술, 정치, 사회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신랄하게 비평한다. 이러한 열린 논쟁이야말로 공공미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동력이다. '새 장르 공공미술'과 같은 현대 미술을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개념이 미국 공공미술에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가 1981년 설치한 <기울어진 호>는 긴 논쟁 끝에 1989년 3월 15일 밤 철거되었다. 뉴욕 연방광장에 세워지자 광장을 이용하는 시민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고 철거를 요구했다. 이렇게 시작한 철거논쟁은 작품이 설치된 내내 진행되었다. <기울어진 호> 논쟁이 공공미술의 지원제도와 미술계 내부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동시대 공공미술의 진보를 가져다 준 <기울어진 호> 논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I. 미술제도 


1. 제도 공간의 탈피 


크림프(Douglas Crimp)에 따르면 세라는 미술의 생산과 수용방식, 미술품의 유통에 대한 제도적 지원들, 이러한 제도들로 대표되는 권력관계들, 요컨대 전통적인 미적 담론이 은폐해온 모든 것을 폭로하고자 했다. 


“미니멀리즘이 미술의 제도화된 상품 유통의 “공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제도 권력의 비판에 실패한 점을 세라는 갤러리, 미술과 같은 제도공간의  형식적 조건에 반대하였다. 세라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별하는 화석화된 사유를 거부하면서, 거리에서 배운 교훈들을 다시 갤러리로 가져올 것을 주장했다. (...) 세라는 갤러리를 역습함으로써, 즉 갤러리를 조각을 볼모로 삼아서 갤러리의 권위를 거부하고 갤러리를 투쟁의 장소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투쟁이 미술가의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비판이 있다. 켈리(Michael Kelly)는 <기울어진 호>는 특정한 공공장소에 맞는 공공미술 작품이라기보다는 공공장소에 세워진 개인의 조각 작품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세라는 공공장소 안에 놓일 공공조각을 제작하는 대신 공공장소를 사유화한 것이다.  


2. 미술의 대체소비 거부


세라는 <기울어진 호>를 통해 미술에 관한 다른 모든 소비 형식을 물리치고 미술의 소비를 미술의 물리적 현실(material reality) 속에서 이루어지를 추구했다(크림프). 물리적 현실은 특히 사진이라는 기록물로 소비되는 미술의 복제, 즉 미술의 대체 소비(surrogate consumption)를 거부하는 현실이다. 


“만약 당신이 조각을 사진이라는 평면으로 환원시킨다면, 당신은 조각의 찌꺼기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작품의 순간적 경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조각의 소비방식일 수 있다. 그것은 회화를 소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통해 소비하는 방식이다." 


이는 당시 대지미술, 개념미술 등이 미술의 물질화를 피하는 대신 사진이나 영상과 같은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작품화하는 흐름에 대한 세라의 저항이었다. 미술 작품(특히 조각)은 구체적인 물질(사물)로 남아야하고, 관객은 그 사물과 만남으로써 예술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세라의 생각이었다. 이는 세라가 미니멀리즘과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미니멀리즘이 사물 자체로부터 전시공간으로 미학의 전선을 확장하였다면, 세라는 사물 그 자체에 더 집중하였다. 


3. 미술의 탈상업화


<기울어진 호> 논쟁은 미국에서 공공미술 기금의 존속여부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작업하는 공공미술 작가들은 때때로 후원금보다 비싼 제작비를 들여야 할 때가 많다는 작가의 증언이 청문회에서 나왔고 세라 또한 이에 동조했다. 즉 작가가 정부의 지원을 받고 공공미술을 하는 것은 꼭 돈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건 단순한 계산으로 정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물론 돈을 떠난 작가의 창작의욕이 작용했겠지만 무엇보다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향후 얻게 되는 이득, 즉 명예와 이와 직결하는 작품 가치와 가격의 상승 등이 작가의 고려대상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이후 세라를 포함한 미술가들이 여전히 정부 프로젝트 공모에 참여하고 작업하는 현실은 작가들이 자신의 비용을 들여서 작업에 참여하는 복잡한 이유를 설명한다. 


더구나 세라는 자신의 작품을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공공의 영역으로 이동시킴으로써 미술의 상업화를 피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미술의 상업화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니멀리즘이 비슷한 생각으로 상업화에 저항했지만, 크라우스가 지적하였듯 그들 또한 상업화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미술이 사회구조의 기본축인 자본의 지배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미술의 근본적인 한계 속에서 결과적으로 세라가 시도한 미술의 탈상업화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미술평론가 심현섭



출전: 김달진 미술연구소 (Seoul Art Guide)



 

Prev [NEWS] Guadalupe Maravilla Receive The Lise Wilhelmsen Art Award, One of the World’s Largest Art Pri
Next [NEWS] An Offense to Women: Scantily Clad Statue Draws Sexism Debate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