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이선영: 생태 미학으로 다시 읽은 배종헌의 작업

December 8, 2021


배종헌의 작업을 생태주의 미학과 비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폐기물에서 유물 사이의 어디엔가 위치하는 재료들을 활용하는 그의 작품들은 자연의 푸릇한 기운과 그리 가깝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의 백과사전 두께의 작업집서를 출판하기도 한 작가는 개념적 성향이 강하여 물질적 재료를 많이 사용하지 않아 전시가 끝나면 작품이 ‘아름다운 쓰레기’로 되는 곤혹스러움을 피해왔다는 점은 생태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초기작 중에 잘 알려진 <청계천 변 멸종위기 희귀생물 도감>(2003)은 실제 멸종위기 동식물이 아니라, 청계천변 길바닥에서 발견한 오브제들이다. 그는 당대의 일용품이 골동품이 되어가는 과정을 진화의 맥락에 놓아본다. 여기에는 자연 선택보다 훨씬 빠른 주기로 작동하는 사회의 선택이 반영되어있다. 그에게는 자연이든 문명이든 거듭해서 해석되는 오래된 텍스트다. 작업만큼이나 생각을 많이 하는 작가이기에, 개인전 전시 부제 또한 작가의 의도를 찾아보기에 충분하다. 



 

배종헌, [어떤 선], 사루비아다방, 2000년.



 언뜻 자연이 연상되는 전시 제목만 해도 《흔적기관》(2018), 《배종헌.ZIP; 첩첩산중》(2018), 《별 헤는 밤》(2014), 《야생》(2011), 《도시농부_유유자적》(2008), 《변방으로부터의 욕망−잡초프로젝트》(2005) 등이 있다. 또한 문명이 자연의 주기에 접어들었음을 암시하는 부제로 《사물 기행》(2015-2016), 《시간의 스펙트럼−유물 프로젝트》(2005)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2019년에 있었던 한 전시의 부대 행사에서 “일상의 사물이 유물처럼 보인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자원의 소모가 아니라 재활용된 것이 많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개념에 따라서는 엄청난 물량 공세도 필요하고, 필요하면 그조차도 감수한다. 2016년의 대구미술관에서 가족과 관련된 주제의 전시 《네상스 Naissance》를 열었을 때 작가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거의 체험의 장이라 할 만한 여러 무대들을 만든 것이 그 예다. 전시장은 결혼,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과 관련된 부분들로 구분되어 있고, 관객의 동선은 그 과정을 공유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자연과의 연결고리는 선명했다. 가정은 문명/자연의 구도에서 자연의 역할을 담당했던 이데올로기적 관행의 중심에 놓인 제도 중 하나다. 근대 자본주의는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별하고 사적 영역인 가정에 자연의 역할을 맡겼다. 그곳에서 공적 영역에서는 배제된 모든 것이 해소되리라 믿어진다. 하지만 공적 영역에서의 소외는 대개 사적 영역으로 연동될 뿐 해결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희망 사항이 있을 뿐. 공적 영역에서의 소외를 모두 해소하는 기적의 담당자는 대개 가정주부, 즉 여성이지만 공적 영역에서 배제된 예술가는 남녀를 불문하고 ‘자연’으로 간주 된 그 영역에 묶이게 된다. 출산과 육아가 생물학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유년기가 동물과 달리 매우 길다는 자명한 사실을 감춘다. 인간은 자연이 아닌 상징적 우주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것이다. 《네상스(Naissance》 전에서 배종헌은 현실 세계의 축약본으로서의 가정을 다뤘는데, 특히 전쟁터와 다름없는 육아의 현장으로서의 가정은 ‘길이 없는 지도’를 가야 하는 상황과 비교되었다. 


 르네상스(renaissance)에서 빠진 ‘re-’는 작가가 가정에서 직면한 총체적 난국이 재현(representation)될 수 없는 과정임을 강조한다. 자연 또한 소유되고 지배되기 위해서만 재현될 뿐이다. 이미 낭만주의 시대에 재현될 수 없는 자연에 대해 ‘숭고’한 미학이 정립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배종헌은 다시 ‘미니멀’한 자세로 되돌아왔다. 필자는 그것을 2018년 《흔적기관》 전과 《2019년 아르코미술관 중진작가 기획초대전》의 작품에서 본다. 아르코미술관에서 대거 선보인, 먼지를 출발로 한 그림들은 주변적이거나 부재 하는 것들을 중심에 놓는 시도이다. 그 출발은 몇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배종헌의 생태 미학에 관련된 이 글은 그의 최근 작품들과 그 기원으로 생각되는 《꺼풀》 전(2000년,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의 한 작품과 이후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개념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의 작업은 자연으로부터 출발하거나 자연으로 귀결하려는 미학적 운동과도 거리가 있다. 그의 작업은 우회를 거쳐서만 생태주의와 관련이 있으며, 이러한 우회 때문에 더욱 근본적이다. 


 배종헌의 작품은 생산지상주의 사회가 쏟아내는 것들을 대량 소비하며 생겨나는 폐해, 즉 생태주의 미학의 중요한 축인 환경 문제를 야기하는 생산주의에 반대한다. 생산지상주의에 상응하는 미학적 개념은 바로 재현주의이다. 그는 현대미술가라면 다들 원했던 재현주의로부터 어떻게 벗어났는가. 2000년 말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그룹전 《꺼풀》에서 발표한 작품 중 하나인 <어떤 선>은 매끈한 화이트 큐브가 아닌 야생적 벽면에서 찾아낸 얼룩에 약간의 가필을 통하여 그런 전시장 같은 지하공간이라면 나올법한 생쥐 이미지를 제시했다. 비닐 위에 보드마커로 붉은 선 하나를 그은 것이 전부였는데, 그 선은 벽면의 얼룩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면서 얼룩을 이미지로 변화시켰다. 그가 그은 ‘어떤 선’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에 대한 연구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구별한 유사와 재현 중 유사에 해당된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재현한다는 것은 지시하고 분류하는 제 1의 참조물을 전제로 한다. 반면 유사한 것은 시작도 끝도 없고 어느 방향으로나 나아갈 수 있으며, 어떤 서열에도 복종하지 않으면서 조금씩 달라지면서 퍼져 나가는 계열선 을 따라 전개된다”라고 썼다. 


  수지 개블릭(Suzi Gablik)도 마그리트에 대한 평전에서, ‘유사성은 어떠한 것도 내포하지 않는 형태의 조합이다’라는 마그리트의 말을 인용하면서, 재현과 구별되는 유사란 “상식에 따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영감이 부여한 체계대로 현상의 세계에서 형상들을 자연스럽게 모으는 것과 관련된다”라고 말한다.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벽의 얼룩과 가필된 선의 조합은 열린 상상력으로 확장될 뿐 생쥐를 재현한 것은 아니다. 재현은 원형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생산제일주의의 종말을 예견하고 그것을 촉구도 한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섹스의 황도》에서 생산의 원래 의미는 사실상 뭘 만든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게 한다’, ‘나타나게 하고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생산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 것을, 즉 비밀과 유혹의 차원에 속해 있는 것을 강제로 구체화한다는 뜻이다. 생산주의의 정점에서도 모든 것이 포르노그래피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현실이 도래한다. 


  보드리야르는 모든 것을 나타나게 하여 기호의 관할 아래 두려는 필사적인 시도는 외설스러움을 낳는데, 그것이 현대문화의 본래적 조건이라고 결론 내린다. 리얼리즘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사이비 실증주의, 즉각적인 현실, 요컨대 바로 금액으로 재현될 수 있는 시스템이 현대자본주의를 지배한다. 생산제일주의의 단기적인 전망에서 지속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재현의 최후 영역으로 남아있는 몸이나 자연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생산제일주의, 또는 재현주의로부터 탈주하는 것이 현대예술에서 요구된다. 2001년 대안공간 풀에서 있었던 《B를 바라봄》 전에서 <수두와 친해졌다>와 <수두가 그리워!>라는 제목은 자신의 몸에 남아있는 병의 흔적을 표현한 것이다. 가리고 싶은 것을 뒤집는 역전의 방식은 이후 터널에 낀 시꺼먼 오염물질로부터 영감받은 유토피아 같은 절경을 그리게 했다. 


  배종헌의 작품에 산이 많이 나타나는 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청소년기에 몇 박 며칠에 걸쳐 지리산을 종주한 경험도 있는데, 그것은 그의 산 풍경이 멀리서 지나가면서 본 풍경은 아님을 알려준다. 그는 세상을 산 풍경으로 본다. 그는 작품으로 표현한 꿈속의 산을 홀로 소요한다. 자연에 대한 뿌리 깊은 친화력은 시궁창 같은 현실 속에서도 자연을 투시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콘크리트 벽면의 균열과 얼룩을 활용한 작품에 <초평송가 草坪松歌> 같은 고풍스러운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2019년 아르코 중진작가 전에 《미장제색 美匠霽色》이라는 전시 부제로 대거 선보인 것은 캔버스가 아닌 자작나무 합판에 그린 유화로, 미끄덩거리는 이물감을 기이한 풍경으로 승화시킨 작품들이다. 그는 이 전시의 작품에 대해 ‘가난해서 작품 재료는 쓰레기가 많았지만, 작업의 내용은 고민을 많이 해서 유형화되지 않고 지각 불가능한 것을 꿈꿨다’고 밝힌다. 


  ‘난 개념미술이었던 것 같았지만, 돌이켜 보니 개념미술은 한 줌의 이야기꺼리에 불과하다’라고 하면서, ‘개념미술에 대한 피로감과 공허감이 느껴졌다’고 토로한다. 개념미술 또한 재현주의일 수 있다. 개념을 재현하는 것에 머문다면 말이다. 배종헌은 ‘좀 더 예술의 본질적인 문제로’ 가고 싶어했고, 이러한 모색의 결과가 최근에 만개한 회화적 작업이다. 하지만 재료나 태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장제색》에서의 작품은 구름에 둥 떠 있는 듯한 환상적 풍경이지만, 최초의 출발 자체는 터널 안의 ‘콘크리트 균열과 생채기, 얼룩, 그리고 껌딱지’다. 작가는 이 전시를 ‘어느 반지하 생활자의 산수유람’이라고 칭했다. 그것은 반지하의 누추한 공간이지만 거기에서 작업을 통해 산수유람을 하는 마법을 체험하고 그것을 관객과 공유한다. 산수유람의 출처가 먼지로 뒤덮인 콘크리트 문명이라는 점이 역설적이다. 이러한 변화는 너무나 극적이어서 거의 세탁 수준이다. 작가는 콘크리트 문명에서 단단함 보다는 균열을 본다. 그리고 작업을 통해 그 균열을 더욱 확대하고 또 다른 세계를 열어제친다. 


  붓 대신에 호명된 미장이의 도구는 벗겨내고 긁어내는 등의 거친 행위 또한 담고 있다, 하지만 ‘미장’의 본뜻은 아름다움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미술의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장제색》이라는 이국적이고도 고풍스러운 제목은 많은 화가의 로망인 <인왕제색도>부터 미장이의 노동에 이르기까지 온갖 잡다함의 복합체다. 그 밖에 <터널 산수>나 <콘크리트 산수> 같은 제목의 작품들은 그에게 자연이 결코 초월적이거나 순수하지 않음을 알려준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터널에 낀 오염물인 까만 때들은 퇴락의 흔적이 아닌 생성으로 거듭난다. 작가는 그 찌든 때에서 동굴 벽화 같은 원초성과 동양화에서 나오는 바와 같은 이상향을 발견한다. 그런데 그가 본 세상과 절경과 먼지가 다른 것인가. 조지프 어메이토(Joseph A. Amato)의 《먼지》에 담긴 통찰에 의하면, 애초에 우주와 세계, 자연이 모두 먼지(cosmic dust)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배종헌이 연금술적으로 만들어낸 절경은 역설이라기보다는 순리일지도 모른다. 


미술평론가 이선영

출전: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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