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uary 05, 2022
관객마다 취향이 있겠지만, 나의 경우 번듯한 화이트 큐브보다는 터 무늬가 살아있는 장소에 더 애정이 간다. 어디선가 만든 것을 툭 가져다 놓기보다는 주어진 장소와의 대화에 오랜 시간 골몰하며 그 장소가 아니었으면 빛날 수 없는 특화된 무엇인가 생성되었을 때 더욱 감동적이다. 한때 미술계의 무서운 아이들(Enfants terribles)로 등장했던 대안공간들에 그러한 장소 및 관련 기획이 많았다.
최성임, ‘missing home’전, 2013년 문래동 정다방프로젝트에서의 작품 설치 전경,
각설탕으로 만든 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녹아 사라진다.
점차 미술계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그러한 야생적인 공간들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현장’이 사라져 가는 것과 맞물리는 듯하다. 누구와도 대체될 수 있는 호환성 있는 직무만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따박따박 월급 받는 삶을 마다하고 활동하는, 이름 앞에 ‘독립-’자가 들어가는 직함을 보면 장하다는 생각이 든다. 공간과 인간은 구조적으로 연관된다. 전시장뿐 아니라 개방적이고 투명한 공간에 대한 나의 불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독재정권으로부터 정치적 탄압을 받아 옥살이했던 지식인 신영복은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에서 한여름에도 다닥다닥 붙어 있어야 하는 한 방의 수인(囚人)들이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묘사한 바있다. 미셀 푸코가 파놉티콘을 분석하면서 예시했듯이, 감옥의 모델은 일상에 편재한다. 개방적인 구조로 설계되곤 하는 근대적 스타일의 건축 또한 감옥의 패러다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열린 감옥이라는 것. 사방팔방으로 뚫려있으나(또는 그렇기 때문에) 편안한 느낌을 주지 않는 건물이 많다. 설계자는 똑같은 상황을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할 것이다. 그런 곳은 말하기보다는 보기, 머물기보다는 통과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말하기와 머물기는 소음과 정체의 증후로, 공간 설계자로서는 피해야 할 요소일 것이다. 보면서 통과하는 공간은 전형적인 전시성 공간이다. 그것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가장 필수적인 기능이기도 할 터이다. 이러한 공간은 그 자체가 플랫폼으로 인간이든 물질이든 빠른 순환을 요구하며, 전 과정은 육안으로든 기계를 통해서이든 투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미술평론가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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