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이선영: 설렘과 두려움 사이에 있는 ‘작가와의 대화’

January 12, 2022

가창창작스튜디오 작가와의 만남


현장에서 비평 활동을 하면서 평문을 쓸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작품을 보는 것과 작가를 만나는 일이다. 리뷰를 쓸 때는 작품만 볼 때도 있지만, 프로젝트와 프로그램에서는 작가를 만나는 것은 필수고, 실제 작품은 나중에 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가가 작품으로 다 보여주면 간단하고 또 그러한 믿음도 팽배하지만, 작가와의 대화는 작품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작가와 만나기 전 자료를 보고 이후에도 자료를 보지만, 그것들이 단순히 추상적 자료를 넘어서 살아있는 맥락을 갖게 되는 것도 만남의 결과이다. 이는 수백 년 전에 죽은 예술가를 연구하곤 하는 미술사가들이 누리지 못하는 호사이다. 작가가 손수 챙겨주는 자료도 있고, 심지어는 연구하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 물어볼 수도 있으니, 평론은 미술사와는 다른 이점이 있다. 또한, 완성된 평문에 대한 즉각적 피드백을 받을 수 있으며, 미술계에서 활동하면서 차후에 이어질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다. 현재를 다루는 평론은 미술사만큼의 객관성은 없지만, 추후에 그러한 객관성의 근거가 될 1차, 2차 자료를 생산한다. 만남은 작품 이야기뿐 아니라 사적인 이야기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그 모두가 평문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사적인 이야기를 서툴게 글에 담았다가 상대의 반발을 살 수도 있고, 또 나의 글쓰기 스타일이 작가가 아닌 작품 위주로 흐르다 보니 아무리 긴 대화를 했어도 대화 내용은 평문의 무의식적 배경에 깔린다. 모든 대화는 나름대로 평문의 얼개를 짜고 글을 쓰면서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의 선택에 직면했을 때 참조 점이 된다는 점에서 간접적이다. 물론 직접 인용할 만한 말이나 글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도 한다. 작가는 평문을 위한 중요한 협력자인 것이다.


그래서 작가와의 만남은 그토록 귀중하고 결정적인 기회인데, 모든 기회들이 그처럼 충만한 것은 아니다. 대화가 아니라 각각 독백을 하고 있는 듯한 만남이 대표적이다. 어떤 작가는 최소한 한 시간 이상 논스톱으로 자신을 프리젠테이션 할 수 있는 완벽한 시나리오를 갖추고 있다. 상대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는 식의 이야기라면 먼저 받은 자료에도 다 있는 내용인데 말이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은 완벽하게 자신의 조율을 거쳐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자유로운 대화의 흐름을 가로 막는다. 그러한 ‘대화’는 협소한 맥락 속에서만 청산유수일 뿐이다. 상대에게 똑똑하다는 인상을 주고 실수 없이 잘해냈다는 안도감을 줄지언정, 대화를 통해 얻어가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헛똑똑이’ 스타일은 작가가 말과 글에도 능해야 한다는 ‘스펙’ 지상주의가 낳은 괴물같이 다가온다. 두 번째 유형은 자료만 대략 보여주고 교수님한테 강의를 들으려는 식으로 침묵하는 경우이다. 삶은 호박처럼 이리 찔러봐도 저리 찔러봐도 아무런 탄성도 느낄 수 없으며, 나만 원맨쇼하고 있는 듯한 상황. ‘ 어떻게 하나 보자’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처럼 억압적인 상대도 없다. 이 유형은 자신의 틀에 굳게 갇혀있는 첫번째 유형과 달리, 너무 열려 있다. 젊은 작가들을 주로 만나고, 어떤 만남의 경우에는 작가에게 조언도 해줘야 하는 성격이 있기에 학교와는 거리가 먼 나조차도 나름대로 선생 같은 의무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대를 구경만 하려는 태도는 대화의 걸림돌이 된다. 나도 젊은 작가에게 해줄 말은 있지만, 그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므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타파하기 위한 말을 위한 말이 나 스스로도 공허하게 들려온다. 그렇다면 듣는 상대도 마찬가지겠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두 극 사이에서 나머지들이 배열되는 것 같다.


미술계가 좁고 각자 열심히 하다 보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만, 작품과 평문이라는 결과물을 겨냥하고 집중적으로 대화를 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래서 서로에게 중요한 그 기회를 망치고 나면, 대화에 대한 결과물을 내야 할 시점에서 곤혹스러워진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대화가 아닌 독백의 결과를 독백처럼 내뱉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의 잘못이든 상대의 잘못이든 대화가 헛도는 이유는 대화의 중심에 구체적 작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작품은 산만해질 수 있는 대화를 수렴, 발산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매개이다. 대화 당사자 앞에 놓인 당면한 현실이며 현재이다. 작품이라는 현재가 아니라, 자신의 과거(나, 이런 사람이야.), 또는 미래(난 이렇게 되고 싶어!)만 있을 때, 대화는 길을 잃고 대화의 결과물도 공중에 매달리고 만다.


미술평론가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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