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QUE] 심현섭: 권미원의 장소 특정성 이론에 나타난 공동체 불가능성과 장소해제의 문제


January 01, 2022


1. 들어가며


미술은 한 번도 장소를 떠나본 적이 없다. 삶의 터전은 미술의 처음 장소였다. 무기와 몸에도 미술은 터를 잡았으며 수호의 상징인 솟대가 마을을 장식하였다. 권력과 손잡은 미술은 신전과 교회의 벽에서 기득권을 향유하였다. 권력이 무너지자 광장으로 나온 미술은 이내 부르주아를 등에 업고 미술관으로 장소를 옮겼다. 미술관에서 대중의 경외를 기다리던 미술은 20세기 후반 들어 미술관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해프닝, 퍼포먼스, 공동체 미술 등 다양한 형태로 공공장소에 펼쳐지는 미술은 원시의 그것처럼 인간의 삶에 밀착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미술이 그 시원에서부터 장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지라도, ‘장소’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권미원이 2002년 발간한 『장소 특정적 미술(One Place after Another: Site-Specific Art and Locational Identity)』은 60년대 이후 공공미술의 역사적 계보를 정리하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고, 장소에 함의된 정치·사회적 의미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장소 특정적 미술, 권미원 지음, 현실문학 (출처: 알라딘) 



권미원에게 장소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제도 등 인간의 역사가 맞물려있는 역사의 축적물로서 의미의 함축, 즉 기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권미원의 책 제목이 가리키는 ‘또 한 장소’는 차이 없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장소이다. 이는 ‘장소 정체성’을 상실한 장소로서, 지리학 등에서 말하는 장소이론의 ‘장소상실(placelessness)’로서 다양성이 사라진 획일화한 현대 장소의 특징을 가리킨다. 권미원은 장소성이 살아있는 다양한 장소의 건설을 위해 미술이 감당해야 할 역할과 방법을 장소특정성 미술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권미원에 의하면, 장소 특정적 미술은 현상학적인 미니멀리즘의 교훈으로부터 출발했다. 작품을 보여주는 장소에 함의된 제도적 틀에 저항한 미니멀리즘 미술은 전시장소의 물리적 매개변수에 점점 더 의존하지 않는, 이슈와 담론을 가리키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미술은 자연스럽게 이슈와 담론의 당사자, 관심자 등으로 구성된 공동체를 주목하게 되고, 장소는 공동체로 대체하였다.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이 이를 대표한다. 장소의 정의가 물리적 근거가 있는 고정적이고 실제적인 입지로부터 유동적인 가상의 담론적 벡터로 전환한 것이다. 권미원은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의 실천을 예로 들면서, 공동체의 건설이 실제로 가능한가라는 공동체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공동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권미원은 대안으로 ‘집단적인 미술의 실천’과 장소 선정의 부담을 넘어선 ‘장소 해제(unsiting)’를 제시한다. 


본고는 유목주의적이고 탈영토화된 사회와 문화에서 권미원이 새로운 장소의 건설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 ‘장소 해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권미원의 장소 특정성 이론의 분석을 통하여 그의 ‘장소해제’가 장소를 추상화하여 결국 자신이 추구한 차별화된 장소를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모순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2. 미술에서 장소 개념 도입과 그 의미 


공간과 장소에 대한 탐구가 미술의 영역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1980년대 말 이후, 공간적 차원을 단순히 배경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 모든 인간의 행동과 의식이 공간에 의해, 공간 속에서 구성된다는 ‘공간(space)’과 ‘장소(place)’에 대한 학문적 중요성이 사회과학계 전반에 퍼졌다. 푸코는 20세기가 공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전에 공간이 가지고 있는 학문적 유용성이 정치적·실천적 담론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장소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역사적 사건의 구체적 현장이다. 장소라는 개념을 축으로 미술사를 정리하려는 권미원이 장소를 정치·사회적 기호로서 파악하고 장소 특정적 미술을 고찰한 점은 장소이론과 유사한 면이 있다. 특히 작가의 유목이 작품의 가치들을 장소로 이동하게 하였다고 하면서 이를 진정한 경험과 역사적, 개인적 정체성의 소재지로서 장소(place)가 문화적으로 승인받는 결과로 보는 관점은 공간성으로 옮겨가는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의 장소 특정적 미술을 이해하게 한다. 따라서 장소이론의 장소와 장소상실을 고찰하는 것은 권미원이 제기한 장소의 개념을 분명히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건축, 지리학 등 공간과 장소에 대한 사유의 길잡이는 하이데거(M. Heidegger)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전 사유과정을 축약해서 말하면 “인간존재의 장소성 귀환” 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기술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정복하고 개발과 가공을 거쳐 인위적인 방식으로 처분하는 것이다. 인간과 대상 사이에 기술적 조작이 매개함으로 사물과 인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이리하여 사물 존재와 인간 존재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자는 예외 없이 그 자신을 잃어버린다. 오직 기능적 연관 관계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갖는 부속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존재의 위기로 인해 인간 존재 및 모든 존재의 상실과 본질(본성)의 위기를 초래한다. 장소를 인간이 존재의 이웃으로 거주하고 뿌리내리는 “고향”으로 파악한 하이데거에게 기술에 의한 존재상실의 시대는 “현대인의 고향상실(modern homelessness)”의 시대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정하든 안하든 창공에 꽃 피우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의 뿌리를 땅으로부터 일궈내야 하는 식물”이다. 20세기 들어 일련의 학자들이 우리의 뿌리를 땅으로부터 일궈내는 작업을 전개한다. 형이상학적인 하이데거의 참다운 장소는 공간에 대한 건축현상학적 접근을 시도한 노베르그-슐츠(Christian Norberg-Schulz)에 의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되었다. 공간의 시대’에 대한 담론이 급증하는 데는 공간 연구의 선구자,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하비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장소와 공간, 장소감과 장소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본격화한 렐프(Edward Relph)의 이론을 중심으로 그 개념들을 살펴본다. 


렐프는 장소경험의 본질에 대한 연구가 미비한 점을 지적하면서 장소의 현상학적 탐구를 전개한다. 그는 장소 정체성과 장소의 구성요소로 1.정적인 물리적 환경, 2.활동 3.의미를 드는데, 장소의 의미는 인간의 의도와 경험을 속성으로 한다. 장소감은 대상으로서 장소가 개인적·집단적 장소경험을 통하여 정체화하여 인간 내면의 의미세계로 융합된다. 렐프는 장소성이라는 개념을 개개인의 정체성과 안정감을 확보해주며, 인간이 세계 내에서 뿌리내리고 실존하게 해주는 중요한 근원이라고 하면서 장소성이 상실해가는 현 세태를 지적한다. “장소의 독특하고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이 약화되는 현상, 즉 무장소성이 지금 지배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징후들이 많다. 이러한 경향은 실존의 지리적 토대에 상당한 변화가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변화란 장소에 깊이 뿌리내린 삶으로부터 뿌리 뽑힌 삶으로 변하는 변화이다.” 


장소성이 상실한 상태를 무장소성(placelessness) 혹은 무장소라고 한다. 장소가 독특하고 다양한 경험과 정체성이 약화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장소성을 추구한다. “누구나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일체감을 느끼는 관계를 맺으려는 욕구, 다시 말해서 인식 가능한 장소 안에 존재하려는 욕구를 타고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래서 장소감은 어쩌다 얻은 멋있는 기술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어떤 것이다.” 하비나 르페브르는 장소성 상실의 원인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세계화, 정보화, 근대성 등 유물론적 토대로서 사회적 배경에서 찾는다. 렐프 또한 사회의 지배적인 경제체제가 변화하면서 지배적인 장소경험이 무장소성이 어떻게 우리의 생활 속에 파고들었는가를 분석함으로 생활토대의 중요성을 수용한다.


렐프를 비롯한 학자들이 장소를 사회, 정치, 실존적, 현상학적 맥락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장소가 범람하는 세태에 대한 처방을 시도했듯이 권미원 또한 “미술의 장소 특정성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과정들에 대한 문화적 맥락으로 재구성한다. 권미원은 이와 같은 장소상실, 즉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장소의 반복이 거듭되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장소와 미술의 올바른 관계에 근거한 장소 특정적 미술의 올바른 실천에 있다고 본다. 여기에 그가 1960년대 이후 공공미술을 장소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분석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가 ‘한 장소 다음에 또 한 장소’처럼 차별성 없는 ‘무장소’의 나열로 획일화하지 않는다.



3. 장소에서 공동체로


권미원은 60년대 이후 장소 특정적 미술의 계보를 현상학적, 사회적/제도적, 담론적 패러다임의 변화로 해석하였다. 모더니스트 조각이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장소를 초월하고 유목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받침대/대좌를 흡수했다면 1960년대 후반 이후 장소 특정적 미술은 미니멀리즘의 현상학적 이해에 기초를 두었다. 그 결과, “모더니즘의 관념적 공간은 자연 풍경의 물질성이나 순수하지 않은 일상적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전통적 매체와 그 제도적 배경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미학적 열망, 의미의 근거를 오브제에서 ‘맥락의 우발성으로 옮기고자 하는 인식론적 도전’, 데카르트적 주체로부터 신체 경험의 현상학적 주체 모델로 재구성하려는 시도, 미술의 상품화를 조작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세력들에 저항하는 욕망 등은 결국 미술을 실제적인 장소에 밀착시켰다. 


미니멀리즘의 맥락적 사유 방식에 힘입어 다양한 형태의 제도비판 미술과 개념미술은 장소를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견지에서뿐 아니라 미술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문화적 틀로서 다양하게 상정했다. “미니멀리즘이 미술 오브제의 의미를 오브제 자체로부터 그것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향하게 하면서 자율적인 미술 오브제라는 관념적 신비주의에 도전했다면, 제도비판은 전시 공간 자체가 지닌 관념적 신비주의, 즉 제도적 위장,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복무하는 규범적인 전시 관습 등을 부각시킴으로써 미술과 그 제도가 사회경제적, 정치적 과정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음을 폭로했다.” 이렇게 미술의 장소는 미술이 놓이는 공간으로부터 분리되면서, 특정한 입지를 지닌 물리적 조건은 장소 개념의 핵심에서 멀어졌다. 


권미원은 이상과 같이 장소 특정적 미술의 계보를 정리하고 “장소의 실질적인 정의가 물리적 근거가 있는 고정적이고 실제적인 입지로부터 유동적인 가상의 담론적 벡터로 전환하였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이어 권미원은 오늘날, 장소 특정적이고 장소 지향적인 미술의 진정성과 같은 전통적인 미학적 가치, 저자의 역할, 비물질과 반상품의 위상, 유목주의의 시장자본화 등 네 가지 측면에서 담론 기반미술을 검토한다. 이에 대한 권미원의 검토 결과는 부정적이다. 특히 지배문화, 자본주의와 미술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장소가 차별과 개성이 없는 무장소로 전락한데는 장소 특정적 미술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미술이 장소에 통합되어 장소를 ‘상품화’하고 ‘시리즈화’하면서 장소의 차별을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즉 장소 특정적 미술이 지배문화와 자본주의에 포섭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술은 자본주의의 포섭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권미원이 공동체 기반미술에 관심을 돌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Richard Serra's Tilted Arc ​(Courtesy: David Aschkenas)



이미 장소 특정적 미술과 공공미술의 논의가 겹쳐지는 것을 피력한 바 있는 권미원은 공공미술의 역사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에서 권미원이 공공미술을 살피는 목적은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 즉 공동체 기반미술과 공동체를 고찰하기 위해서이다. 권미원의 이러한 고찰은 자본주의에 포섭된, 그래서 무개성의 장소를 반복하는 현실을 극복하는 대안을 공동체 기반 미술에서 찾으려 했음을 암시한다. 권미원에 의하면 1981-1989년 동안 이루어진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Tilted Arc)>(1981, 맨해튼) 철거 논란에서, <기울어진 호>가 전적으로 장소에 부적합하다는 주장은 1990년대 공공미술 담론의 향방에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기울어진 호> 사건 이후, 공공미술에서 공동체의 참여를 유도하라는 지침은 강화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존 에이헌(John Ahearn)은 사우스 브롱스 44번 구역 경찰서의 ‘미술을 위한 퍼센트’ 프로그램을 맡게 된다. 세라가 연방 광장에 위치한 자신의 조각이 특히 (공간에 대한) 공적인 개입이기를 의도했던 반면, 에이헌은 자신의 조각이 제롬 에비뉴에 동화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에이헌의 작품은 철거되었다. 세라나 에이헌 모두 공동체에 대한 개입의 적절성 면에서 실패한 것이다. 여기에서 권미원은 공공미술을 세라의 조각에 토대를 둔 분열적(disruptive) 모델과 에이헌의 공동체 상호작용에 토대를 둔 동화(assimilate)로 구분하고 ‘개입적인’ 장소 특정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작가가 어떻게 공동체에 개입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공동체 기반미술이 미술이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대안이라면, 미술 혹은 작가는 어떻게 공동체에 개입해야 하는가? 



4. 공동체의 불가능성과 집단적 미술실천


권미원은 공동체 개입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에 의해 명명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예로 1993년의 퍼포먼스 <행동하는 문화>를 든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초점을 미술가에서 관객으로, 오브제에서 과정으로, 생산에서 수용으로 이행시키며, 특수한 관객 집단의 직접적인 참여(이상적으로는 협업을 통해 저자성을 공유하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처럼 작품에서 특수한 관객의 참여가 강조되면서 ‘장소’는 이슈와 관객, 무엇보다도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교체되었다. 권미원은 실제 작업의 실행 과정에서 협업할 공동체의 정체가 분명하지 않다고 하면서, <행동하는 문화>의 8개의 프로젝트에서 드러난 신화적 통합체로서의 공동체, 이미 자리 잡은 공동체, 일시적으로 창출되는 공동체, 지속하도록 만들어진 공동체 등 네 가지 공동체를 분석한다. 그 결과, 권미원은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발견한다. 그 이유는 공동체의 획일화한 정의규정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자신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불공평한 권력관계를 악화시키고 이미 소외된 이들을 다시 주변화, 식민화하며, 미술의 과정을 탈정치화 및 신화화함으로써 미술과 삶의 분리를 더욱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권미원은 이런 결과들을 제도의 개입과 압력의 소산으로 보고, 공동체기반 미술 내에 발생하는 권위적 계급이 차이의 식민화를 낳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파악한다. 그러나 이러한 계급적 권위의 왜곡된 모습은 꼭 어떤 계층의 문제라기보다는 (미술가들 또한 전문가계층에 속해 있는 경우가 많은 오늘날에는 더욱) 공동체 기반 미술에 내재한 불가피한 한계이다. 따라서 공동체 기반 미술의 발전적 전망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더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이에 권미원은 지금까지 공동체 기반 미술의 윤리적 차원, 특히 미술가와 공동체 사이의 상호작용의 본질, 그리고 공동체 기반 미술이 지닌 미학적이며 사회학적인 점에 대한 논의는 있었으나 정작 공동체 개념에 대한 논의는 간과된 점에 주목하고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권미원은 아이리스 마리온 영(Iris Marion Young)이 지적한 공동체 기반 미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즉 집단 정체성에 매몰된 구성원 개인의 정체성 상실, 집단 정체성이 가지고 있는 왜곡된 권위의 은폐 가능성, 동질적인 집단 구성체 보호를 위한 차이의 억압 등을 근거로 ‘공동체의 불가능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고 미술가들의 모든 기획을 포기하는 것은 조급한 패배주의이다. 권미원은 공동체 기반미술의 대안으로 협업과 공동체의 대안적 가능성을 그려볼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공동체에 대한 재개념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권미원은 공동체의 재개념을 위해 장-뢱 낭시(Jean-Luc Nancy)의 ‘무위의 공동체’를 인용한다. 그러면서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한 방안으로, ‘공동체 기반 미술’과 대립되는 ‘집단적 미술 실천(Collective artistic praxis)’을 제시한다. 공동체 기반미술이 제도적이고 행정적인 틀, 권력에 의해 기술적으로, 통일된 정체성의 틀 안에서 일관성 있는 획일화 과정으로 이루어진다면 집단적 실천 미술은 투사(projective)를 통해 프로젝트 스스로 기능하는 열린 체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열린 체계의 과정이 “비일관성, 모호함, 불확실성”을 불러올 수 있지만, 그것이 공동체가 집단 정체성을 미리 상정하는 권력에 의한 획일적인 일관성 보다는 낫다고 여긴다. 권미원은 장소 특정적 미술이 장소를 공동체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공동체가 여전히 위계적 권력과 자본주의에 포섭된 상태에서 획일적인 장소의 반복을 거듭하고 있다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전체주의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는 공동체를 포기하고 ‘집단적 미술’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공동체에 대한 단정적인 장소 선정(siting)의 부담을 넘어선 장소해제(unsiting)를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장소를 선정하는 부담은 탈영토화와 유목주의와 관련이 있다. 권미원에 의하면 들뢰즈나 가타리의 리좀적인 유목주의는 차이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전통적인 통설을 해체하기 위한 강력한 이론적인 도구이다. 그러나 권미원이 보기에 유목주의는 자유와 해방의 효과만큼이나 정체성의 불안을 유발할 수 있다. 게다가 유목할 수 있는 능력에는 여전히 권력관계가 작용한다. 공동체의 집단적 정체성을 피하려다가, 개인의 정체성마저 해체되는 상황에 대한 권미원의 부담이 장소해제라는 대안으로 나아간 동기로 보인다. 권미원은 장소가  “물리적 실제성에 묶여있는 향수적인 장소(사이트) 개념 내지 정체성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점은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장소로서의 사이트라는 유령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그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이 생존수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목주의와 정착주의 모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립들을 지속되는(sustaining)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리하자면, 실제적인 장소나 정체성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난 장소 특정적 미술은 결국 장소해제에 닻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맞닿게 될 유목주의와 정착주의는 양자택일이 아닌 공존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시선은 곧 등가성에 호소하는 대신 불균등한 조건에 주목하는 태도로서 우리가 머무는 수많은 장소들이 ‘한 장소 다음에 또 한 장소’처럼 차별성 없는 나열로 일반화하는 것을 견제한다. 



5. 권미원의 모순: 공동체 불가능성과 장소해제(unsiting)의 문제


권미원이 장소 특정성 미술의 대안을 모색하면서 던진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정하는 것은 공동체나 그 가치가 아니라 그 실현 가능성이다. 공동체가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로서, 계급적 권위와 전체주의 때문이다. 이는 공동체가 추구했던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서 권미원은 공동체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태도보다는 지금까지 역사에서 이루진 적이 없는 공동체가 과연 실현 가능한가라는 비변증적 관점으로 혼란과 불확실성 안에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공동체와 공동체적 가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집단적 미술 실천, 장소해제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집단적 미술 실천에서 말하는 프로젝트 스스로 만들어지는 집단은 사실상 공동체 기반 미술의 공동체와 이름만 다를 뿐 그 실제적인 역할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적으로 쟁점과 관객의 참여가 중요시되는 공공미술에서 공동체(집단)의 형성은 불가피하다. 한 개인보다는 집단의 판단과 결정은 더 신뢰할 만하고, 집행은 합리적일 가능성이 더 크다. 구성원의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집단의 존재를 부정할 필요는 없으며, 그러한 공동체를 부정하면 현실적으로 작업의 성취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공동체 자체를 부정하기 보다는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강조한 합리적 의사소통 구조나 부버(Martin Buber)의 나-너(Ich-Du)의 관계 회복 같은 공동체의 억압적 구조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의 개발이 더 중요하다. 권미원의 집단적 미술 실천 또한 내용적으로, 공동체의 새로운 형식이라기보다는 건전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평등한 태도, 겸손한 자세와 같은 도덕률을 강조한 공동체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권미원은 자신의 방법론을 구체적인 공동체와 동일시하면서, 건전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실천의 어려움을 곧바로 공동체 자체의 불가능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오류에 빠진다. 권미원이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장소 미지정과 장소 해제의 길을 발견한 점은 당연한 귀결로 보이며, 그것은 권미원 논리의 추상성과 비현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구체적인 장소의 지정 없이 어떻게 집단적 미술 실천이 가능할 것이며, 지루한 ‘또 한 장소’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권미원과 달리 하비는 장소와 예술의 연관성을 피력했다. 하비의 언급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창조적인 예술작품의 번성이 자연 토양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면서 “이 같은 뿌리를 잃어버리면, 예술은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었던 의미 없는 풍자(caricature)로 전락한다. 따라서 문제는 의미 있는 뿌리가 정착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고향을 회복하는 일이다. 장소 건설은 뿌리를 회복하고 거주의 예술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 점이다. 이는 장소성의 회복에 있어 예술이 감당할 역할을 역설한 것이다. 반면, 권미원의 장소 해제는 공동체의 관념화, 즉 공동체를 의식 속에서만 인식하는데 만족하고,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공동체 건설에 대한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실제적인 장소, 지정된 지역을 간과하면 권미원이 시도한 새로운 장소 또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적인 장소의 무-개성(無-個性)을 장소특정성 미술로 극복하려고 시도했던 권미원의 입장에서 이것은 모순이다. 이 같은 모순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권미원이 불가능하다고 본 공동체에 대한 담론을 복기해야 하는데, 그 시작은 그가 장소 특정적 미술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이 논의에서 나는 공동체/성의 실현이 미술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주장하고 도전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에 속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공동체 실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은 포기해서는 안 될 숙제이며, 특히 그 도전이 구체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할 것이다. 


백종국은 “인간은 그 출생부터 소멸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적 존재로 나타나므로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인식의 궁극적이고 단독적인 주체로 믿는 개인들로 구성된 공동체는 왜곡된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은 공동체를 떠날 수 없다. 그러나 공동체의 잠재적, 부정적 결과인 획일화, 전체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경계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공동체를 벗어나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하려는 경향을 나타낸다. 특히 정치적으로 자유 시장을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가 사회구성 체제에서 우월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개인주의는 극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위에서 언급한 장소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 있다.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자본주의는 장소를 물신주의, 환경파괴, 빈부격차가 집약된 무개성으로 획일화한 경관을 만들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장소의 문제를 재점검하지 않으면 인류의 생존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은 공동체적 가치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게 하였다. 개인적 자유주의자든지 공동체주의자든지 다 같이 인간이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에는 대체로 동의한다. 문제는 어떻게 전체주의를 피하거나, 최소화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권미원이 공동체기반 미술에 동의하면서도 결국 공동체의 불가능성에 도달한 이유는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전체주의의 위험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기준은 총체적인 삶의 방식의 공유, 일정한 규모의 대면관계(face to face relationships), 상호 호혜 의무(reciprocal obligation), 집단 정체성의 유무 등이다. 이상의 기준을 다 갖추려한다면 그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기에 결국 전체주의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면서 전체주의적 요소를 최소화하는 공동체를 위해서는 위의 조건들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는 개인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얕은 공동체(shallow community)’의 범주에 속한다. 


권미원이 비판한 공동체 기반 미술의 문제는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미리 선정된 공동의 가치, 즉 집단 정체성, 불평등한 상하관계, 새로운 권력의 탄생 등이다. 이러한 문제는 해결될 수 없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 공동체의 한계라는 것이다. 이의 극복을 위하여 권미원은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를 인용한다. 낭시는 자기 스스로 고유의 정체성과 결정권을 바탕으로 독립할 수 있다고 믿는 주체를 부인했다. 그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한 모든 단일화에 실패하는 공동체이다. 각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항상 타자(他者)이며, 매순간 동일성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이다. 권미원이 공동체 기반 미술에서 부정하는, ‘이미 규정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죽음과 같은 유한성을 가진 평등한 존재라는, 그래서 단독으로 존속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타자를 향한 외존의 움직임 속에서 존재하는 유한성을 분유하는 공동체가 곧 무위의 공동체이다. “진정한 공동성이란 없다. 공동의 존재도 없다 그러나 공동 내의 존재(being in common)는 있다”는 낭시의 언급은 권력에 의해 사전에 규정된 집단의 정체성보다는 개체 존재의 자율성이 더 중요하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권미원이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를 인용한 이유는 이에 있다고 보인다. 즉, 상대에게 공동체의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동일성에 대한 기대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공동체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성찰 없이는, 권미원에게 공동체는 ‘이상화된 유령(idealized spector)’에 불과한 것이다. 


낭시가 지향하는, 단일체도 실체도 없는 공동체는 미완성이라는 원리에 의해 나아간다. 


“따라서 공동체라는 단일체도 그 실체도 없다. 왜냐하면 그 분유가, 그 이행이 완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완성이 그 ‘원리’이다. 미완성을 불충분성이나 결핍이 아니라, 분유의 역동성을, 또는 단독적 균열들에 따라 끊이지 않는 이행의 역학을 가리키는 역동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이러한 낭시의 언급은 공동체의 실체를 부인하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재의 공동체에서 부딪히는 현실적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한, 자기성찰과 비판의 근거로 작용하는 철학적 논거라고 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미완성’은 공동체의 포기가 아닌 완성을 향해가는 역동적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공동체 내에서 자기 주체를 강제하기 보다는 평등에 근거한 유한성의 분유를 끊임없이 경험해나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낭시는 공동체의 구현을 위한 한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지, 공동체 자체를 부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 낭시는 또 바타유가 공동체의 영역성이 어떤 영토가 아니라 탈자태-타자와의 관계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입증되는 상태에 이르는 깨달음의 경지-의 영역성을 형성하게 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영토와 경계에 대한, 모든 종류의 지역적 분배, 예를 들어 도시 계획에 대한 물음들이 다시 제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권미원은 공동체 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오만함을 비판하는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개념을 적용하여 구체적 장소의 선정을 포기하고 해제하는(unsiting)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장소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의 구체성을 희석하고 추상화하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데모스 또한 권미원이 장소를 지리학적 혹은 물리적 장소 대신 담론의 영역으로 대체하면서 물리적 실재, 역사성이 제거되었다고 보고, 그 논리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장소의 추상화는 권미원이 비판했던 ‘또 한 장소’의 반복을 개선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공간의 역사성에 천착하는 카를 슐뢰겔(Karl Schlögel)은 “모든 사건과 사고에는 사람뿐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장소도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어떤 역사적 기술도 장소에 대한 언급 없이는 구성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과 역사와 장소의 불가결한 관계를 지적한 것이다. 장소는 존재의 진리가 소재하는 현장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 거시적 권력에 저항하는 국지적 의식이 형성되고 조직될 수 있는 역사의 장이다. W.J.T 미첼은 공간, 장소, 풍경을 라캉의 상징(symbolic), 실재(real), 상상(imaginary)의 개념과 연결시킨다. 공간이라는 개념을 ‘상징적인 것(the symbolic)’으로 볼 수 있다면, 위치로서 장소는 라캉의 ‘실재(the real)’, 즉 트라우마와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권미원이 제기한 무개성한 장소가 반복되는 현상에 저항하고, 변화, 개선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장소의 선정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점에서 하비는 무장소적 정치나 사회운동이 아니라 장소에 기반을 둔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장소는 “개인적인 것이 특정 장소들에서 국지적 연대의 조직을 통해 정치적이게 되는 근본적 운동에서부터 권리와 정의에 관한 보다 보편적인 정치로 나아가도록 하는 운동의 주요매개 요인”이다. 하비의 말을 원용하면 공동체 기반 미술로 진화해온 장소 특정적 미술은 실제적이고 지시적인 장소를 기초로 했을 때 비로소 예술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장소 특정적 미술이 담론을 기반으로 하든,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든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장소를 잃어버리면 미술관에서 광장으로, 광장에서 담론과 공동체로 나아온 장소와 미술의 긍정적인 변화를 향한 지금까지의 노력을 추상화해버릴 가능성이 있으며, “구체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흔적을 지우며, 그 장소와 연결되어 작동하는 그들의 심리적 구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권미원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획일화한 장소의 반복과 이로 인한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 상실은 최병두가 지적한대로 현대사회에서 장소성 재생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자마저 장소성 상실의 원인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 결과인지 모른다. 우리가 장소의 개선과 변화와 공동체의 회복을 원한다면 지난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지시된 장소에 대한 탐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6. 나가며


권미원은 미술과 장소의 관계를 통해 장소개념의 중요성을 부각하여 통찰력 있는 분석과 이론화에 성공했다. 특히 장소를 인간 역사의 축적물로 보고 공동체 기반미술과 공동체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시도하여, 열린 체계로서 집단적 미술 실천의 중요성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유목주의가 창궐한 시대에 정착주의의 공존을 재고함으로써 무개성적인 반복을 일삼는 오늘날의 장소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불가능성이라는 성급한 결론과 그 결론을 바탕으로 내놓은 장소해제 등의 대안에 함의된 장소의 관념화는 자신이 추구한 장소의 개선을 오히려 늦추거나 제지할 위험에 노출하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권미원 스스로가 말했듯, 장소에 대한 사회학적(권력, 경제 등) 역학관계에 대한 분석이 없으면 자족적인, 관념적인 환영, 곧 관념주의의 환영에 빠져든다. 사회학적 역학관계 분석은 실제 장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이 사는 장소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배경이 각각이다. 각기 다른 특수한 장소를 보편화된 관념의 장소로 상정하고 사회학적 역학관계를 분석할 수 없다. 구체적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역사에 대한 탐구가 없으면 새로운 장소의 실현은 점점 더 멀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장소 특정적 미술은 어떤 경우든 구체적인 장소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소의 개선을 소망하며 장소 특정적 미술의 방향을 모색한 권미원의 모순은 구체적인 장소의 선정을 포기한데서 비롯하였다. 



미술평론가 심현섭


출전: 김달진 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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